[북리뷰]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 알랭 드 보통
"사랑의 가장 큰 결점 가운데 하나는 그것이 비록 잠시라고 해도 우리에게 심각한 행복을 안겨줄 위험이 있다는 것이다."
영화 <러브픽션>에서 희진(공효진)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합니다. "사랑해! 모든 여자들이 좋아하는 그 말 말고, 나만 알아들을 수 있는 그런 말을 해봐!" 이에 주월(하정우)은 그의 연인 희진의 요구에 얼떨결에 "나는 너를 방울방울해"라는 그들만의 친밀성의 언어를 급조해내죠. <러브픽션>의 이 장면은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의 다음 구절과 자연스레 오버랩됩니다.
"순간 나는 클로이의 팔꿈치 근처에 있던, 무료로 나오는 작은 마시멜로 접시를 보았다. 갑자기 내가 클로이를 사랑한다기보다는 마시멜로한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마시멜로가 어쨌기에 그것이 나의 클로이에 대한 감정과 갑자기 일치하게 되었는지 나는 절대 알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 말은 너무 남용되어 닳고 닳아버린 사랑이라는 말과는 달리, 나의 마음 상태의 본질을 정확하게 포착하는 것 같았다.
더 불가해한 일이지만, 내가 클로이의 손을 잡고 그녀에게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나는 너를 마시멜로 한다고 말하자, 그녀는 내 말을 완벽하게 이해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그것이 자기가 평생 들어본 말 중 가장 달콤한 말이라고 대답했다. 그때부터 사랑은, 적어도 클로이와 나에게는, 이제 단순히 사랑이 아니었다. 그것은 입에서 맛있게 녹는, 지름 몇 밀리미터의 달콤하고 말캉말캉한 물체였다."
희진과 주월에게는 '방울방울해'라는 말이, 그리고 이 책의 주인공인 나와 클로이에게는 '마시멜로해'라는 말이 오직 둘만이 이해할 수 있는 비밀스러운 암호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이 비밀스러운 암호는 둘 사이를 더욱 끈끈하게 연결시켜주는 접착제인 셈입니다. 이러한 친밀성의 언어는 그 누구도 침입할 수 없는 둘만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합니다. 둘만의 암호가 늘어갈수록 둘만의 세계는 점점 더 단단해지고 그 안에서 서로에게 더욱더 헌신하게 되는 것이죠. 알랭 드 보통은 이를 재치 있게 '한 판의 달걀'에 비유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달걀이 언제든 깨져버릴 수 있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상대방의 바구니 안에 모조리 담아버리는 것, 그것이 바로 상대방을 향한 믿음이고 헌신이라는 것이죠.
이러한 믿음과 헌신, 즉 사랑이 깊어질수록 심지어 우리는 이런 착각까지 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익숙해지기 오래 전부터 이미 그 사람을 알고 있었다는 묘한 느낌. 전에 어디선가, 어쩌면 전생에서, 또는 꿈에서 만났던 것 같기도 한 그런 느낌." 플라톤의 <향연>에서 아리스토파네스는 사랑하는 사람이 원래 우리와 하나였다가 떨어져 나간 우리의 '반쪽'이기 때문에 이런 익숙한 느낌이 생긴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언제나 자신으로부터 떨어져 나간 반쪽과의 결합을 원하게 되었다는 것이죠. 사랑은 이렇게 우리의 눈을 멀게 하고, 귀를 막아버리고, 착각에 빠지게 만듭니다.
클로이에게 첫눈에 반한 주인공은 연인이 된 클로이와 그 누구보다 '마시멜로우한' 나날들을 보내지만, 지속되는 행복은 슬그머니 불행을 떠올리게 만들죠. 답을 알 수 없기 때문에 더욱더 무시무시한 그 의문. 바로 "이 사랑이, 우리의 이 이야기가 어떻게 끝날 것이냐" 하는 의문입니다. 작가는 이를 "이것은 마치 건강과 힘이 충만한 상태에서 자신의 죽음을 상상해보려는 것과 같다."라고 표현합니다. 사랑의 소멸에 대한 불안감으로 인해 우리는 오히려 함께 미래를 꿈꾸며 기댈 곳을 찾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사랑이 갑자기 시작되었듯이, 갑자기 끝날 위험이 있기 때문에 공동의 운명에 호소함으로써 현재를 강화하려고 하는 것이죠. 결혼하고 나서는 어디서 살 것인지, 자식을 몇이나 낳을 것인지, 은퇴 후에는 어떤 식으로 연금을 받으며 살 것인지. 일종의 방어기제가 아닐까요.
그러나 주인공인 나와 클로이의 끝은 이별이었고, 단단했던 그 둘의 세계는 산산조각이 나버리고 맙니다. 조각난 그 세계의 파편들은 주인공의 가슴을 사정없이 후벼파고, 이별의 아픔을 이기지 못한 주인공은 자살 시도를 감행하기까지 합니다. 주인공은 다시는 그 누구도 사랑하지 않겠다고 금욕주의적인 삶을 결심하지만, 어느 날 자신 앞에 불쑥 나타난 레이첼이라는 여자에게 푹 빠져버리고 맙니다. 클로이와의 이별이라는 쓰디쓴 아픔을 견디고 나서 다시는 사랑이란 '잘못' 따윈 저지르지 않겠다고 다짐했지만, 클로이에게 빠졌던 것처럼 레이첼에게 빠져버리는 '잘못 아닌 잘못'을 다시 저지르게 되는 것이죠. 이러한 주인공의 모습이 낯설지 않은 이유는 결코 우리들의 모습과 다르지 않기 때문일 것입니다.
대책이 서지 않는 사랑의 고통 때문에 비관적이 된 나는 사랑으로부터 완전히 떠나버리기로 결심했다. 낭만적 실증주의가 도움이 될 수 없다면, 유일하게 유효한 지혜는 다시는 사랑에 빠지지 말라는 금욕주의적 충고였다. 나는 이제 상징적인 수도원으로 물러나, 간소한 서재에 처박혀서 아무도 만나지 않고, 소박하게 살아갈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디너 파티에서 레이첼이라는 여자를 만났다. 그녀는 나에게 자신의 사무실 생활을 이야기해주었는데, 나는 그녀의 눈에 푹 빠져들고 말았다. 순간 나는 금욕주의적 철학을 내팽개치고 클룅에게 저질렀던 실수를 모조리 되풀이하는 일이 얼마나 쉬운지를 깨닫고 충격을 받았다. 레이첼의 모습은 나에게 금욕주의적 접근방법의 한계를 일깨워주었다. 사랑에 고통이 없을 수 없고, 사랑이 지혜롭지 못한 것일 수는 있지만, 그렇다고 잊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사랑은 비합리적인 만큼이나 불가피했다. 불행히도 그 비합리성이 사랑을 반박하는 무기는 되지 못했다.
아무 사이도 아니었던 두 사람이, 어떤 계기로 점점 더 서로에게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을 보면서 더없이 행복하고 달콤한 기분을 느꼈지만, 결국엔 '너무 사랑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이별하는 모습을 보면서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도 '네가 너이기 때문'이며,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는 이유 또한 결국 '네가 너이기 때문'"이라는 말이 머릿속에 자꾸 맴도네요. 언젠가 이 책을 다시 집어 들었을 때 제가 어떤 감정을 느끼고 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은 내가 너를 사랑하는 이유가 '네가 너이기 때문'이라는 그 이유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왜 너는 나를 사랑하지 않는가 하는 질문은 왜 너는 나를 사랑하는가 하는 질문만큼이나 대책 없는 [또 훨씬 덜 즐거운] 질문이다. 두 경우 모두 우리는 연애의 구조에서 우리가 의식적인 통제를 할 수 없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바꾸어 말하면 사랑은 우리가 완전히 파악할 수 없는 이유들 때문에 받을 자격도 없는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졌다는 사실에 부딪히게 된다.
일단 그런 질문을 하게 되면 우리는 한편으로는 완전한 오만으로 기울거나, 다른 한편으로는 완전한 겸손으로 기울 수밖에 없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받을 자격이 있는가? 겸손한 연인은 자신이 무엇을 했을 리가 없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묻는다. 내가 무엇을 했기에 사랑을 거부당하는가? 배반당한 연인은 그렇게 묻는다. 그러면서 오만하게도 절대 자신의 몫이 아닌 선물의 소유권을 주장한다. 사랑을 베풀 위치에 있는 사람은 이 두가지 질문에 대하여 오직 한 가지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네가 너이기 때문에. 이 답을 듣게 되면 질문을 했던 사람은 자만과 우울 사이에서 위험하게, 예측할 수 없이 흔들릴 수밖에 없다."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읽고 센치해진 밤이 되었네요!
이상으로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에 대한 리뷰를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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