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밖에 나가 서 있기만 해도 땀이 주룩주룩 흘러내릴 것만 같은 날씨다. 이런 날에는 집에서 에어컨을 틀고, 머리가 띵할 듯이 시원한 맥주 한 캔을 홀짝이며, 소소하게 영화나 한 편 보는 것이 가장 큰 행복이다.
02.
'보고싶어요'라고 찜해두고 계속해서 묵혀두었던 영화 시리즈, 비포 트릴로지(Before Trilogy)를 보았다. 나는 세 편의 영화를 연달아서 몰아봤지만, 사실 영화 사이에는 각각 9년이라는 간격이 있다. 영화의 회차가 거듭될수록 더께가 쌓여가는 주인공들의 사랑을 보면서, 이 시간을 함께하며 늙어갈 수 있던 세대가 너무나도 부러워졌다.
03.
비포 트릴로지 시리즈의 포문을 여는 '비포 선라이즈(Before Sunrise)'는 달달함의 끝판왕이다. 영화는 어떻게 보면 단조로울 수 있을 정도로 제시와 셀린의 대화만으로 이루어지지만, 가만히 그들의 대화를 엿듣고 있자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빠져들게 된다. 이 세상에 단둘이 남겨진 마냥 다양한 스펙트럼의 대화를 나누며 서로에게 몰입하는 그들에게 상대방은 곧 자신의 우주다.
04.
'비포 선셋(Before Sunset)'은 서로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게 되는 전환점이다. 비포 선셋에서도 비포 선라이즈와 마찬가지로 제시와 셀린이 다양한 배경에서(공원을 거닐며, 카페에 앉아, 유람선에서, 그리고 차를 타고 이동하며-) 쉴 새 없이 대화를 나누는데 그 대화에는 함께하지 못했던 시간에 대한 짙은 아쉬움과 여전한 그리움, 꾹꾹 눌러담고 있었던 애정이 봇물 터지듯이 쏟아져 나온다.
05.
비포 트릴로지 시리즈의 마지막 '비포 미드나잇(Before Midnight)'은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아프다. 서로를 너무나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더 서로를 할퀴며 상처를 주고 만다. 제시와 셀린이 다시는 서로 사랑하지 않을 것처럼 싸우는 모습은 비포 선라이즈의 첫 장면이었던, 기차 안에서 큰 소리를 지르며 언쟁을 하던 어느 부부의 모습을 상기시키기도 한다. 비포 선라이즈에서 제시와 셀린이 서로에게 푹 빠져 사랑만을 속삭이던 모습과는 아주 대조적으로.
그러나 미드나잇(Midnight)이 지나면 선라이즈(Sunrise)가 돌아오듯이, 그들은 다시금 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한다. 결국 선라이즈-선셋-미드나잇-선라이즈…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순환과 반복은 제시와 셀린으로 대변되는 모든 남녀의 사랑과 갈등을 나타내는 것일지도 모른다.
06.
3편의 영화를 끝내고, 마지막으로 들었던 생각은 '결국은 용기'라는 말이었다.
[비포 선라이즈]
기차 안에서 두 주인공이 처음 만났을 때, 제시가 셀린에게 말을 걸 용기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셀린이 제시를 따라 기차에서 내릴 용기가 없었더라면?
[비포 선셋]
파리에서 다시 재회했을 때, 제시가 그 때 그 약속을 지키려고 기차역 플랫폼에 나왔었다는 이야기를 할 용기가 없었더라면? 그리고 셀린이 제시를 생각하며 만들었던 노래를 제시 앞에서 불러 줄 용기가 없었더라면?
[비포 미드나잇]
호텔 안에서 두 주인공의 갈등이 극단으로까지 치달았을 때, 제시가 자존심을 굽히지 못하고 셀린을 향한 여전한 사랑을 표현할 용기를 내지 못했더라면? 그리고 셀린 또한 화를 삭이지 못하고 제시가 어렵게 낸 용기를 받아들이지 못했더라면?
비단 연인 관계에서뿐만 아니라, 인생을 살아가면서 타이밍에 맞는 용기를 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 줄 알기에. 서로에게 한 발짝 더 다가가는 용기를 낸 제시와 셀린의 사랑이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것은 아닐까.
07.
30대가 되고, 40대가 되고, 꼬부랑 할머니가 되어서도 곁에 있는 소중한 사람과 함께 보고 싶은 영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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