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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에게 23년 상반기는,
23년 상반기가 끝났다.
작년에는 매월 어찌어찌 꾸역꾸역 회고하며 스스로를 돌아봤는데 올해는 단 한 달도 회고하지 못했다. 그래서 마음이 힘들었던 것일까, 아니면 마음이 힘들어서 회고를 피하고 싶었던 걸까. 계속 피하고만 있었던 문제를 마주하고 하반기를 시작해보려고 한다. 숨 한 번 고르고.
내 안에서 방황하며 춤추던 칼날이 결국은 나 스스로를 겨눴다. 나는 완전히 지쳤고, 자존감과 자기 효능감은 완전히 바닥을 쳐버렸다. 어떤 것에도 동기부여가 되지 않았고, 사람들이 미워졌으며 가장 미웠던 것은 나 자신이었다. 자신감을 잃었고, 위축되었고, 의견을 말하는 것이 두려워졌다. 다 던져놓고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회사에 입사한 것이 잘한 결정이었을까?'
'이 직무를 계속하는 것이 맞을까?'
'나는 정말 이 일을 좋아하나?'
'내가 이 역할을 계속해서 수행하는게 맞나?'
땅을 파면 한도 끝도 없이 파고, 동굴로 들어가면 한도 끝도 없이 들어가 버리겠다 싶었다. 감정의 소용돌이를 잠재우고 뇌에 덕지덕지 붙어있는 걱정과 우울을 걷어내고 모든 것을 내려놓고 잠깐 멈춰야겠다는 생각이 든 순간이었다.
끝난 상반기를 냉정하게 복기하고 감정을 분리하고 하반기를 준비해야했다. 이렇게 계속했다간... 정말 튕겨져 나가 버릴 것만 같았으니까. 이곳에서 계속해서 자기 효능감을 유지하고 일하고 싶다면. 나 스스로를 그만 괴롭힐 때가 되었다.
우선, 상반기를 천천히 되돌아본다. 그리고 머릿속이 맑아지고 나면 하반기를 계획해보기로 한다.
사진첩과 블로그, 노션에 간단히 끄적이던 일기를 열어보니 상반기에 이런 것들을 했었네.
1월
- 내집마련반을 수강하고 성남시 분당구 임장을 다녀왔다.
- 어머님 생신을 축하드리러 온 가족이 모여 낙원진갈비에서 맛난 소고기를 배부르게 먹었다.
- 회사 건물 3층에 있는 필라테스 센터에서 필라테스 수업을 시작했다.
- 보너스 받은 기념으로 남편과 택산가든28에서 살살 녹는 브리스킷 - 바베큐 플래터를 먹었다.
- 팀에 같은 포지션으로 일할 동료분이 입사했다.
- 메가박스에서 유령을 봤다. 리클라이너 좌석에 누워 오랜만에 몰입하는 경험.
- 업무적으로는 기존 플랫폼을 운영함과 동시에 새로운 플랫폼 기획 협의를 진행했다.
2월
- 사무실에서 요구르트 마시다가 그 요구르트를 키보드에 엎지르는 바람에... 키보드를 새로 샀다. 그것도 레.오.폴.드.
- 아버님 생신을 축하드리러 평택에 모여 호박오리샤브샤브를 먹고 왔다. 늘 아낌없이 주시는 시부모님.
- 남편 요리 실력이 일취월장하고 있다. 남편 덕에 처음으로 '파피요뜨'라는 음식을 먹어봤다.
- 그렇게까지 빨리 급속도로 가까워지고 친해질 줄 몰랐던 개발자분이 입사했다. 그와 동시에 팀에 입사했던 막내 신입이 퇴사 의사를 밝혔다.
- 그 사람의 문제를 내가 해결해 줄 수 없고 더 이상 감정적으로 공감하기 버겁다고 느껴지면서 버디 활동이 힘들어졌다.
- 회사 사원증 프로필로 시현하다 촬영을 했다. 해보고 싶었는데 덕분에!
- 업무 Role에 변화가 생겼다. 상승세를 타던 지표의 흐름이 2월부터 꺾기기 시작하면서 해당 지표를 전적으로 담당하게 되었다. 팀의 분위기는 사뭇 무거웠고 이때는 이 Role이 상반기 내내 나를 괴롭힐지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3월
- 남편이 로봇청소기를 사줬다. 삶의 질이 말도 안 되게 수직상승했다. 정말 제법이네!
- 진짜 오랜만에 양꼬치에 칭따오를 마셨다. 둘 다 술 잘 못 마시는 우리 부부는 칭따오 한 병에 헤롱헤롱 😵💫
- 쌍둥씨와 미리 생일을 축하하며 롯데타워에 있는 아쿠아리움에 다녀왔다. 벨루가 귀여워!
- 감기를 정말 호되게 앓았다. 나이 드니 감기가 더 오래가는 느낌이네. 한참 골골대다가 겨우 나았다.
- 생일을 기념하여 연차 내고 남편과 오이도 여행을 다녀왔다. 해물 가득 칼국수 먹고 바다 구경 실컷 하고 왔다지.
- 메가박스에서 스즈메의 문단속을 봤다. 눈물, 콧물 줄줄 흘리며 오열했다. 23년 상반기 인생영화로 등극.
- 개선되지 않는 지표로 인해 심적으로 엄청난 고통을 받았다. 갈피를 잡지 못한 채 계속해서 방황했고, 방황했고, 또 방황했다. 방향을 잡은 듯하면 다시 길을 잃어버리는 통에 너무 어려웠고 힘들었다.
- 지쳐있는 나를 위해 남편이 닭백숙 먹으러 가자며 끄집어내 주었다. 몸보신시켜줘서 고마워, 짝꿍.
- 누군가에게 진심을 다해 피드백을 전달하는 경험을 했다. 그 사람이 잘 되었으면 하는 마음, 내가 주는 피드백의 무게를 처음으로 느꼈던 경험. 말하면서도 손을 벌벌 떨었다지.
4월
- 어느새 봄이 훌쩍 다가와있었다. 남편과 함께 평택대학교로 벚꽃 나들이를 다녀왔다.
- 집에 듀얼 모니터를 들였다. 역시나 남편 덕이다. 업무 효율이 100만 배쯤 상승한 것 같다. 진작 살걸!
- 부모님 결혼기념일을 축하드릴 겸 연차를 내고 오랜만에 친정에 다녀왔다. 멀다는 핑계로 자주 찾아뵙지 못해 생각할 때마다 항상 마음이 아프다. 늘 먹먹한 마음뿐.
- 새로운 곳으로 이직을 하고 정신없이 살다 보니 입사 1주년이 되어있었다. 가끔 '내가 이곳을 오지 않았더라면 어땠을까' 상상을 하곤 한다. 사람은 안 해본 것에 대해 더 후회한다고 하던데... 이직 결정에 대한 후회보다 이직을 결정하지 않은 것에 대한 후회가 더 크지 않았을까 스스로 위로를 해본다.
- 4월은 유난히도 잔인한 달이었다. 친했던 동료를 결국 떠나보냈고, 여전히 개선되지 않는 지표로 인해 무던히도 속을 썩였다. 이때부터였을까. 감정 기복이 심해졌다. 기쁘면 한없이 들떴다가, 갑자기 또 한없이 우울해졌다가. 눈물을 줄줄 흘렸다가. 스스로를 다독이다가도 흘러넘치듯 감정이 터져 나오곤 했다.
- 회사에 CTO님이 오셨다. 5월 워크샵을 준비하면서, 그리고 상반기동안 해왔던 업무의 성과를 정리하면서 면담을 하는데... 내세울만한 성과가 없었다. 그순간 너무 비참했고 무안했고... 또 한 번 우울에 잠겨버렸다. 2월에 내가 이 업무를 맡은 게 아니라 새로운 플랫폼을 구축하는 것을 지속했다면 달라졌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핑계를 만들고, 누군가를 탓하고 싶은 생각이 강해졌다.
5월
- 답답한 마음은 계속되었다. 하반기 워크샵 준비를 하면서 불안하고 초조한 마음이 더 강해졌다. 워크샵에서 하반기에 어떤 것을 해야할지 목표와 KR을 고민하고 수립하는 시간을 갖는데 전혀 갈피를 잡지 못했다. 4박 5일간의 경주 워크샵은 제주 워크샵에 이어 최악의 경험으로 남아버렸다. 스스로에 대한 답답함, 돌파구를 찾지 못한 채 헤매고 있는 상황, 이렇게 되어버린 것에 대한 원망, ... 각종 감정이 겹겹이 쌓여 펑펑 눈물로 쏟아졌다. 왜 나만 이러고 있는 걸까? 해결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 이 영상 보고 세븐틴에 입덕했다. 아니 이 친구들 너무 재밌잖아? 예전에 아이돌 보면서 행복해하는 모습... 전혀 이해하지 못했는데 삶의 활력을 느낀다. 세븐틴 멤버들이 서로를 아껴주는 모습을 보면서 참 예쁘다는 생각을 했다. 소소한 행복 모먼트 😊
(참고로 최애는 원우입니다.) - 비 오는 날 올림픽 공원에서 나홀로 나무를 봤다. 나무는 홀로였지만, 나는 남편 덕에 '홀로'가 아니었다.
- 5월 마지막날 왠지 모르게 느낌이 쎄했는데 갑자기 퇴근길에 뙇(!)하고 생각이 났다. 종합소득세 신고해야 하는데... 극적으로 마지막 날에 인지해버렸다. 작년에 신고했음에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 것인지... 세무서에서 연락을 받은 관계로... 이번에 제대로 신고하려 했는데 완전히 깜빡 잊어버리고 있었네. 그래도 다행히 밤 12시가 넘어가기 전 부랴부랴 마무리했다. 작년에 애드센스로 쏠쏠하게 수익을 올렸는데 이제 블로그가 완전히 나락을 가버렸네. 쩝. 🥲
6월
- 오랜만에 쌍둥씨를 만나 연남동에 놀러 갔다. 연남동 '데이오브베이킹'이라는 베이킹 스튜디오에서 인생 첫 마들렌을 만들어보았다. 은퇴하면 구움과자 제빵을 배워볼까 했는데... 재밌긴 했는데 설탕과 버터가 이렇게 많이 들어가는지 처음 알았다. 버터 냄새도 계속 맡으니 역한 것 같기도 하고... 역시 뭐 하나 쉬운 게 없구나 싶었다.
- 새로운 플랫폼 출시가 점점 다가오면서 리소스 투입을 기존 → 신규 플랫폼으로 조금씩 넘기고 있다. 신규 플랫폼 출시 준비도 할 게 이렇게나 많은데... 동시에 기존 플랫폼 운영까지 함께 할 수 있을까 또 한 번 한계에 허덕였다. 반발심마저 느껴졌다. 지금 돌아보면 이 의사결정이 맞다고 백 번 동의하지만... 그때는 왜 이렇게 힘들고 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을까.
- 남편과 1호기 투자 계획을 세웠다. 일단 크게 욕심부리지 않고 우리가 모아둔 종잣돈으로 최선의 선택을 해보기로 했다. 처음 해보는 거라 많이 떨리기도 하고 무섭기도 한데... 제 일처럼 도움을 주시는 분이 계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하다는 생각.
- 주말을 틈타 남편과 우리꽃식물원을 다녀왔다. 전망대 올라가는 길이 은근히 가팔라 등산을 다녀오는 것과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역시 땀을 뻘뻘 흘리며 몸을 힘들게 하니 잡생각이 사라지고 머리가 맑아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머릿속이 각종 근심과 걱정으로 자욱해지는 느낌이 들 때는 꼭 땀을 흘려야겠구나 싶었다.
- 상반기 평가를 받았다. 예상과 크게 벗어나지 않은 평가를 받았고 아쉬움이 많이 남는 상반기였다. 아무렇지 않게, 덤덤하게 받아들일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후 번아웃이 심하게 와버렸다. 결국 와 버리고 만 것이다... 지금까지 어찌어찌 버티고 있었던 게 둑 터지듯 와르르, 정말 와르르르 쏟아지고 있다는 느낌이었다. 출근길에도, 퇴근길에도 눈물이 줄줄 흘렀다. 마음에 병이 왔다는 것을 직감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완전히 도망쳐버리고 싶었다.
어찌어찌 꾸역꾸역 해내는 사람을 '싫지만 어쩔 수 없이 하는 사람'으로 볼 게 아니라, 어떻게든 해내고야 마는 '강한 사람'으로 바라봐야 한다는 말. 작년에 매월 어찌어찌 꾸역꾸역 회고를 하면서 스스로를 돌아봤던 것이 오히려 내 멘탈을 잡아주고 방향을 잡을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던 것 같다.
이번에도 역시나 상반기 회고를 하면서 내가 느꼈던 그 감정들을 드라이한 텍스트로 옮겨내는 과정을 하고 보니 몸도 마음도 차분해지고 내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볼 수 있게 된 것 같다.
지금 보면, 왜 그렇게 힘들어했을까. 더 힘들어지기 전에 좀 더 툭 터놓고 도움을 청했으면 어떨까. 여러 생각이 든다. 상반기에 겪은 성장통이 헛되지 않았으면. 하반기를 마치고 돌아봤을 때 팔 소매와 바지 밑단에 팔, 다리가 쑤욱하고 삐져나오는 것처럼 많이 성장했다고 느꼈으면 좋겠다. 그렇게 될 수 있도록 부단히, 부단히 자라야겠다.
운동하세요. 명상하세요. 책 읽으세요. 글 쓰세요. 재밌게 하세요. 꾸준히 하세요. 나부터 도와주세요. 먼저 사랑하세요.